안녕하세요. 이웃님
오늘은 오랜만에 과학 서적을 읽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과학 책은 아니고요, 과학과 대중문화, 그리고 인문학에 관한 글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서울대 생명공학부의 홍성욱 교수로 '과학기술학'을 전공한 분입니다.
과학기술학이란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연구하는 새로운 학문입니다. 즉, 사회가 과학기술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 내용과 방향을 어떻게 바꾸는지, 반대로 과학기술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분석하는 학문입니다.
저자 홍성욱 교수는 과학과 인문학, 과학과 예술 등의 접점을 발견하는 융합적 과학기술학자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영화와 소설 등의 대중문화를 통해 과학과 인문학, 사실과 가치의 얽힘을 읽어내며 과학을 우리 일상에 더 가까운 곳으로 쉽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이름에서 '교차하다'는 뜻의 '크로스'가 사용된 것입니다.
그럼 몇 가지 기억에 남는 부분을 말씀드려 볼게요
1. 대중문화와 과학의 크로스
노벨상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자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최초의 과학자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갖고 있는 마리 퀴리. 그녀의 이미지는 그녀의 딸이 쓴 <퀴리 부인>에서 만들어집니다. 마리 퀴리는 훌륭한 과학자이기도 하지만 자신 주변의 재원을 아주 잘 활용한 전략가였습니다. 라듐의 원자량을 파악하기 위한 라듐 실험 연구에서 남편 피에르 퀴리와 공동 저자로 표기되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연기한 부분을 명확하게 분리해서 표기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피에르 퀴리와 별도로 자신이 기여한 업적에 대해 과학계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퀴리 부인>의 서두는 "마리 퀴리의 생애에는 너무나 위대한 발자취가 많아, 나는 그녀의 일생을 마치 무슨 전설이나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싶어진다"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됩니다. 이 책이 그녀의 이미지를 만들었죠. 아인슈타인은 그녀에 대해 "얼음장처럼 차갑다"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또한, 퀴리 부인은 남편과 사별한 후 그의 제자였던 폴 랑주뱅이라는 과학자와 사랑에 빠지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가 유부남이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퀴리 부인의 '불륜'은 언론에 대서특필되기도 했습니다.
비교적 최근인 20세기 초반까지 과학은 인종 차별과 소수자 차별의 정당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습니다. 유럽의 백인들은 특정한 인종의 입이나 코가 튀어나와 있는 것을 열등함의 증거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흑인들이 자기들보다 열등한 인종이라고 주장했죠. 또한 당시 백인 남성들을 여성들도 동물처럼 아래턱이 튀어나온 사람들이 많다고 열등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유럽의 백인 남성들은 흑인들은 동물에 가깝지만, 여성의 턱이 돌출한 것은 백인 남성들에게 성적 매력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죠.
2. 세상과 과학의 크로스
토머스 무어가 <유토피아>에서 주장하는 유토피아는 국민들이 생계에 대한 근심 걱정 없이 평화롭게 일을 하고,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화려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 노동자라든지 목수, 농부 등의 사람들이 대접받고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는 사회였습니다.
에드워드 벨라미의 <뒤를 돌아보면서>에서도 유토피아가 그려집니다. 21세부터 45세까지 모든 국민은 남성 여성 구분 없이 의무적으로 산업군에 종사하고 24년간 근무가 끝나면 나머지 일생을 국가에서 책임지는 시스템입니다. 우리가 지금 직장을 다니면서도 불안한 이유는 노후에 대한 걱정 때문인데요. 유토피아에서는 국가에서 우리의 기본적인 노후 생활을 보장해 줍니다. 아~ 그런 사회에 살면 좋겠네요.
유토피아의 반대 개념인 디스토피아도 있습니다. 조지 오웰의 <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나오는 미래 세계가 바로 디스토피아 같은 곳입니다. 이 두 소설에서 인간의 과거에 대한 기억은 망각되어야 하고 사람들은 감시와 쾌락 때문에 생각할 시간도 사랑할 시간도 없습니다. 이 소설들에서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우리가 진정한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겨난 세상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소설들입니다.
3. 인간과 과학의 크로스
유전자 결정론은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전자가 우리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듯, 우리 사회의 미래 역시 유전자 결정론이 지배하는 미래로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실천을 하고,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도 결국은 DNA 속에서 있는 정보가 또 다른 정보를 만들기 위해 거치는 매개물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인간이란 존재의 본질도 결국 프로그램이라는 것이죠. 이런 주장은 정말 섬뜩합니다.
테슬라의 자율주행차가 황당한 사망 사고를 낸 적이 있는데요. 사고 원인은 자율주행 센서가 흰색 트레일러를 구름으로 잘못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우버의 자율주행차가 갑자기 튀어나온 행인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치어서 사망 사고를 내기도 했습니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사람의 많은 역할을 대신하는 미래에 이런 사고는 계속 일어날 수 도 있습니다.
4. 인문학과 과학의 크로스
우리는 흔히 과학의 핵심을 '발견'에 둡니다. 하지만, 과학도 무엇인가를 만드는 활동이기 때문에 과학에서도 상상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과학은 이성에만 근거하고 인문학은 상상력에 근거한다는 말도 있지만, 과학에서도 상상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과학도 결국 인간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릴레오가 주장한 관성의 법칙도 상상력의 발로입니다. 관성의 법칙은 정지해 있는 물체는 계속 정지해있고 운동하고 잇는 물체는 계속 운동하는 의미인데요. 갈릴레오는 마찰이 없는 이상적인 평면에서의 운동을 통해 관성의 법칙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구 상에는 마찰이 없는 평면은 존재하지 않지요. 갈릴레오는 관성의 법칙을 만족하는 이상적인 평면을 상상해 낸 것이죠.
그 유명한 피사의 사탑 실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 갈릴레오는 피사의 사탑에 올라간 적도 거기서 실험한 적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 실험을 해보면 갈릴레오의 주장과는 달리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먼저 떨어집니다. 왜 그럴까요? 갈릴레오는 진공 상태를 가정했기 때문인데요. 진공 상태에서는 쇠구슬과 깃털이 동시에 떨어집니다. 갈릴레오는 저항이 없는 공간을 머릿 속에서 상상을 한 것이죠.
저자는 과학기술학자로서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